교황령의 시작은 귀족이나 제후가 자기 땅을 기증한 거에요.
754년 프랑크 왕 피핀이 교황에게 기증한 것을 계기로 이후 점차 확장되어 교황령으로 발전했다.
교황령이 공격당할 때는 각 지역에서 방어했을까?
교황에게 우호적인 귀족이나 제후가 있다면 중세~르네상스 시기 협력자들에게 군대를 의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고,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가 교황령을 비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황령이 상당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용병제에 의존했던 교황령과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의 안정된 통일 국가를 원했습니다.
교황령은 지방자치제도를 시작합니다.
교황청에서 도시마다 추기경을 다 파견할 수 없잖아요. 그럼 파견할 수 없는 그 지역에는 지역마다 의회를 만들게 하고 지역 의회가 자체적으로 도시를 운영합니다.
군대 없는 국가를 운영하며 행정 시스템을 발전시킨 바티칸.
1500년대부터 스위스 용병의 힘을 빌렸던 바티칸.
전쟁시에서도 스위스 용병이 대단히 유명한데, 오늘날에도 스위스 용병들이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근위병이 늘 자리를 지키는 곳이 있습니다.
교황청 직원과 추기경들이 묵는 숙소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활한 공간입니다.
보통 스위스 근위병이 항상 지키고 있는 건물입니다. 저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없어서,, 근위병이 없는거라고.
바티칸에 스위스 용병이 있는 이유는 중간에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완전히 함락되고
로마시민들도 어마어마하게 죽은 때가 있었습니다. 카를 5세가 왔을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전쟁 중, 교황과 갈등을 빚던 신성 로마 제국.
교황을 지키던 대부분의 용병이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은 끝까지 교황을 지킨다.
189명의 스위스 용병이 수천 명의 병력과 맞서 싸웠고, 147명이 전사한 끝에 교황을 지켜냅니다.
그 이후로 굳건해진 스위스 용병에 대한 신뢰.
그래서 스위스 귄위병이 되는 것을 엄청난 영예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믿음과 충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랑감으로도 최우선 순위라고, 어딜 가도 신뢰의 아이콘임.
교황에게 감히 맞서려고 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정치과 권력 싸움에서 빠지지 않는 교황.
아까는 카를 5세였지만 그전에도 계속 여러 강대국의 전쟁지였던 이탈리아.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소유권을 놓고서 서로 주장을 합니다. 한번은 나폴리의 계승권을 주장한 프랑스 왕.
나폴리를 놓고 벌어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족보 전쟁. 이런 싸움이 일어나면 보통 교황이 중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왕위 계승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 ㄴ교황.
이 경우는 프랑스 왕이 그런 주장을 했지만 이 교황이 프랑스의 주장에도 나폴리의 편을 들어줍니다.
프랑스 왕이 화가 나서 전쟁을 일으켜요. 그러다 결국 교황청까지 와서 교황청을 공격하고
교황은 산탄젤로성으로 도망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이 교황이지 사실은 그냥 군주나 다름 없다고.
그러니까 말이 교황이지 사실은 그냥 군주나 다름 없다고.
유럽 국가들과 치열한 정치와 전쟁을 벌여 온 바티칸.
일반적인 유럽 군주 국가와 다름없었던 교황령.
그 위치를 통해 정치에 개입도 하고 영적인 존재만은 아닌거 같다고.
출처: 알쓸별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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