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역사학자 이익주. 최후의 고려인, 최초의 조선인.


고려 건국 100주년 되던 날 방송이 나감.
고려 멸방에 숨겨진 이야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때 조선을 세운사람
혹자는 이성계라고 하지만 단연 정도전임!

성공한 혁명가이자 성공한 개혁 정치가인 정도전!

정도전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조선을 세운 킹메이커로 알려졌지만 반역을 도모했단 이유로 죽음을 맞는
진짜 정도전의 얼굴은? 



질문에 대한 답은 강연을 통해 얻어가길...!!

여러분 정도전을 아시나요?


정도전이 어떤사람인지 알아야 그가 역적인지 공신인지 판단이 가능함.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는 어땟나?

몽골과 약 30년간 전쟁을 벌인 고려.
1231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온 백성이 항전을 벌였지만 약 100년간 몽골 왕조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고려.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에 친일파가 있었다면 이때는 친원파가 존재함.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 백성의 토지를 강탈.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토지 도둑임. 피폐해진 고려 백성들의 삶.




고려 말의 흔한 한탄.

정도전이 태어난 1342년으로 고려는 국지불국의 상황임
그즈음 한가지 문제가 더해집니다. 왜구죠.

일본인 도적들의 끊임없는 침략.
친우너파 관리의 착취와 왜구에 시달리던 백성들.


 공민왕의 목표
1. 원의 세력을 몰아낸다. 반원!
2. 고려를 정상화한다. 개혁!!

개혁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던 공민왕. 바로 이때 정도전과 같은 변방 출신 관리들이 대거 등용됨. 공민왕의 개혁에 적극 동조한 변방 출신 관리인 정도전



 정도전은 어떻게 왕의 개혁에 참여? 했을까요?

정도전의 고향은 경상도 봉화에요. 워낭소리의 배경인 경상북도 봉화.

1362년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름 수많은 지방 출신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함.

고려말 농업 발달로 경제가 발전. 재산이 늘어난 지방 중소지주들이 자식 교육에 재투자를 함.


공민왕이 희망을 건 신흥사대부, 그 중에 정도전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사대부가 있었나요?  조선의 양반을 일컫는 사대부는 고려 후기부터 등장합니다.

이 신흥사대부들이 만든나라 새나라가 조선이죠.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

원래 성리학이란 그런 것.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유학의 한 계통으로 인간 본성과 우주 이치를 묻는  학문임.

수많은 성리학자들 가운데 개혁에 앞장선 정도전

정도전의 운명을 바꾼 세번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어요.



성균관은 고려시대 인재 양성을 위해 설치된 교육기관 국자감을 1308년 개명한 기관임.
성균관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세사람.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친 관장이 이색이에요. 이색의 문하생이었던 정도전과 정몽주.

훗날 정도전에 죽임을 당하는 이숭인도 성균관 멤버임.


성리학자로서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다. 
성균관의 강사였던 세사람.

성리학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는 학자들이 모인 정치세력.

이색과 정도전은 아버지끼리 친구에요. 이색이 14살 연상임.

이색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운 유학생임. 성균관 후배들에 성리학을 가르침.

사제관계.

정몽주와 정도전의 관게는 예상외로. 굉장히 친한 사이에요.

정몬주가 5살 연상임. 





나의 벗 몽주.

이색, 정도전, 정몽주 세사람의 우정 in 성균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세사람의 엇갈린 운명.




순수하게 사대부로서 고려의 혼란을 잠재울 방법을 고민.
한마음 한뜻이었던 셋. 시간이 지나며 드러나는..

  

여러분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할수 있겠어요?
이색, 정도전, 정몽주 세 사람의삶이 수백년동안 회자된다는 것은 그들 모두 시대를 변화시킨 훌륭한 정치가였다는 것.



신진사대부라는 같은 배경 아래서 정치노선이 달랐던 셋.


성균관에선 몰랐던 차이! 정도전의 운명을 바꾼 두번째 만남.민과의 만남임.


공민왕의 개혁... 반대파가 없었을까요?

친원파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음. 반대파들이 공민왕을 시해하고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듦.


어린왕을 이용해 권력을 잡은 친원파.

반원과 개혁!!

친원파때문에 원라와의 외교관계를 재개.

우왕 원년에 고려로 사신을 보낸 원나라.
사신 영접사로 임명된 34살의 정도전. 그때 정도전이 난데없이 한 말...


" 붙잡아서 명나라로 보내겠다!"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죠. 그런데  정도전이 당시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 것.

원나라를 쇠퇴 시키고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

사대부 가운데 남다른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낸 사건이죠.공개적으로 한거죠.


구차하게 산들 편할리 없다고.

이 사건으로 관직에서 쫓겨나 유배를 떠난 정도전.

1375년 신흥사대부들이 정도전에 동조하다가대거 관직이 박탈되고 유배됨.

정도전의 유배지는전라도 나주의 거평 부곡임.


3년동은 백성과 동거를 한 정도전.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니 그동안 정치를 관념적으로 했구나.


가난한 농민들과 눈물 젖은 밥을 먹으며 한 농민과 나눈 대화.


"어이... 중앙에서 벼슬한 놈 같은데..:
임금의 총애만 받길 희망하고 재상이 돼서 아첨하는 놈 좋아하고

국가의 법을 농단해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고
아주 앉아서 죄를 지은 놈이구나?


지금이 어느 땐지 모르고 바른말 하기만 좋아하고 아래에 있으면서 위사람을
들이받기만 좋아하니 그래가지고 너는 죄를 아니 저지를수 있겠느냐?"

이러니 유배를 오지..."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겠노라 다짐하는 정도전.

정도전의 죄목을 추측하는 가운데 중앙 통치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긴.

부패한 지배층 때문에 고통받던 백성의 삶을 목격함.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치!!

여기부터 다른 신흥사대부와 갈라지는 지점이에요. 유비를 오지 않았더라면 모를 뻔했던 민초들의 삶


 당시 토지제도는 고려 농민들은 생산량의 10분의 1을 국가 관리에게 세금으로  바쳐야했는데  여기까지는 괜찮은 토지제도임.

그런데 고려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었어요. 농민이 직접 관리에게 세금을 내도록 되어있어 이게 문제를 일으켜요.

관리들이 갑질을 시작함.

생산량을 농부의 신고가 아닌 관리가 결정함. 여기까지는 농민들도 참아요.

백성들의 토지 수입으로 배불리던 관리는 당연히 관직에서 물러나면 그 권리를 반납해야 하는데
반납을 슬슬 안 하기 시작함. 암묵적으로 세습돼온 불법적인 관행임.

관리를 국가가 해줘야하는데 지배층에 대한 감시 기능을 잃은 고려.

최대 8명까지도..늘어남.


유배지에서 개혁을 구상하기 시작한 정도전. 그 생각에 기름을 부은 혁명!

4.19 혁명, 프랑스혁명.

혁명은 레볼루션의 번역어로 기존 체제의 혁파를 의미하죠.

과거 혁명이라는 말은 왕을 갈아치운다는 뜻. 위험한 생각을  가장 처음 한 사람.

맹자에요. 성선설을 주장한 중국의 사상가임.


군주는 갈아치울수 있다!!

맹자의 혁명론에 꽂힌 정도전.


정몽주임.

고려의 과거 시험 필수과목인 맹자.
논어, 맹자 , 중용, 대학이 과거 필수 과목이에요.

맹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정도전에 권유한 정몽주.

정도전은 선물받은 맹자를 시간이 나는대로 하루에 한장씩 정독을 함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뒤바뀔지도 모르고 혁명의 명분이 된 맹자를 친구에게 선물한 정몽주.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맹자 속 혁명이란 구절이 떠오른
 다만 아직까지는 고려 왕조를 엎거나 왕을  바꾸는 혁명까진 생각을 안 했겠지만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정도전


정도전의 운명을 바꾼 세번째 만남.!!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 역사를 뒤바꿔놓은 결정적인 만남이죠.
3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다른 신흥 사대부들과 다르게 복직이 어려웠던 정도전.

9년에 걸친 유배와 유랑 생활.
유랑의 시기에 이성계에게서 희망을 발견함.


이성계 군대를 보고 정도전이 한 말.

" 이만한 군대로 무슨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둘의 만남으로 새롭게 쓰이는 역사.

이성계의 군대에서 개혁의 성공을 확신.  무슨 일인들에 담긴 함축적 의미.
여러분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계시죠?

9년뒤 정도전과 이성게는 조선을 건국하죠. 결과를 아는 사람이 빠지게되는 함정이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

첫 만남부터 새 나라를 구상한게 아님. 이성계를 정치대열에 끌어들인 정도전.
최영 장군도 이성계와 양대 산맥 이었잖아요.

왜 이성계여야 했을까?


고려 최고의 군사력을 두 무장.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장군





신흥사대부 사이에선 인기가 없었어요.  반대개혁파들의 편에 있던 최영.

백성을 수탈하던 반개혁파. 청렴한 최영이 늙은 도둑을 살렸다.

기득권 세력에 때묻지 않은 이성계에게 희망을 본 정도전.


이성계가 야망을 품고 있었다면 이성계도 즉답하지 않고



용두사미로 대화를 끝내요. 두사람의 진심은 이런게 아니었겠죠.

과연 무명의 정도전이 혼자 이성계의 군대를 찾아가서 이성계가 만나줬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이 만남에는 숨은 조력자가 존재해요.

이성계와 정도전을 연결해준 조력자는? 정몽주임.
정몽주가 두 사람을 연결해줫을 것. 이색이 쓴 시중에 그 증거가 잇어요.
무려 4262편의 시를 쓴 이색.


이 연구는 선생님이 하고있다고함.

1383년 가을,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던 그때 이색이 지은 시.




시 속에 정첨서는 누굴까.. 당시 왕명의 출납 담당 관직인 첨서서사사였던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정씨 성을 가진 첨사는 딱 한명이었음. 바로 정몽주.

이색의 시를 통해 정몽주가 조력자라는 것을. 알아냄.
1383년에 이성계의 추천으로 전의부령에 오르고 성절사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 사신단 일원이 됨.

성균관의 수장까지 했던 정몽주. 어린시절부터 정도전을 봐왔는데


정몽주도 개혁을 주장함.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정몽주. 그러나 고려 안에서의 개혁은 찬성.
정몽주는 뜻밖에도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개혁을 도모함.


개혁을 구상하던 어느 날 고려의 운명을 뒤바꿀 사건이 일어납니다.
명나라가 고려에 영토를 요구함.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가 그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

최영이 가장 반대가 컸죠. 군대를 조직해 요동정벌을 주장.
압록강을 지나 명나라 땅을 공격할 계획을 세움.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
반대하는 이유는 4가지에요.


4불가론.

이거 학교다닐때 많이 외웠는데 말이죠.

1. 작은나라가 큰나라 뜻을 거스를 수 없다.
2. 농사가 바쁜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3. 명과 싸우는 사이 왜구가 쳐들어올 것이다.
4. 장마철이라 전염병이 유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요동정벌을 주장한 최영.
우왕과 최영의 적극적 의지로 요동 공격이 실현됨.


해서는 안되는 전쟁이다!!

개경으로가 정변을 일으킨 이성계.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죠.

우왕에게 두차례 회군요청했떤 이성계.
안 받아들여지니까 회군의 명분이 생긴거죠. 군사적 우위에 선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그해 겨울 최영을 처형합니다.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만약 회군하지 않고 요동을 공격했다면? 요동점령까지는 가능햇을수도 있었을거라고하네요.

하지만 문제는 그 땅을 끝까지 지킬수 있었을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요동 공격의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하니까요. 그럼 이성계가 위험해졌겠죠.

이성계에게 위화도 회군은 벼랑 끝에 내몰려 내린 불가피한 선택.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에 찬성함. 회군후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고려 고위 관리에 오른 정몽주.

이성계파의 개혁으로 고려는 멸망의 길로... 새나라를 세우는 길로 역사가 전진됩니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는 목숨을 건 개혁의 시작.

위화도 회군 후 실권을 잡은 정도전은 이성계와 개혁을 추진합니다.


갑자기 지위 급상승.

가장 먼저 정도전이 개혁한 것은? 감당할수 없는 세금을 내며 살던 농민들.
불법으로 세금을 받는 권리를 박탈해야 해요.

1389년 4월부터 문란한 토지제도 개혁을 시작.
이색또한 관직에 복귀. 함께 토지 제도 개혁을 논의함. 하지만 뜻밖에도 개혁을 반대.
아마 이색은 개혁의 결과를 고민했을 거라고해요.


관리들이 막대한 세금을 받는 것. 불법인것은 맞지만 그것이 오랜 관행아닌가

역사적 안목을 가졌던 이색은 토지 개혁이 불러올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

고려 왕조를 지탱하던 관리들이 자신의 재산을 반납해야하는 결과가
고려 왕실의 권력 상실을 걱정.

옳은대로 했다가 나라가 망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때 여기에 이색의 고민이 있는거에요.

이때부터 성균관에서 시작된 정도전, 정몽주 이색의 관계가 균열이 생기게됩니다.
정도전이 이색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함. 정몽주는 그들 사이에서 갈등을 함.


1391년 5월 고려가 멸망하기 1년 전에는 정도전이 이색을 사형하라고 주장함.
스승을 공격한 순간.  정도전의 인간관계는 파괴가 됩니다.

이색에게는 자기세력이 없어요. 청렴한 이색이 개혁에 반대하자 불법으로 재산을 모으던 관리들이 이색을 반가워합니다. 이색 뒤에 숨은 기득권 세력.

제자로부터 목숨을 위협당하며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는 이색.
결국 토지 제도 개혁은 2년만에 성공하게 됩니다.

과전법은 세금을 받던 전직 관리의 권리를 박탈.
수확량의 10분의 1만 세금으로 내게 한 법.
다른 신흥사대부들이 승리를 외칠때 이게 끝이 아니라며 새로운 논점을 제기하는 정도전.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는데..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폐 청산을 넘어선 더 근본적인 변화. 새로운 이념으로 새작되는 미래를 꿈꿨던 정도전.
이 시기의 불교는 그런 오명을 쓸만했어요. 고려의 불교는 정치와 결합이 되어
기득권 세력의 돈으로 큰 사원을 짓고 승려들이 고리대업에 진출까지함.
불교가 귀족화 된 것. 불교 배척을 매개로 고려왕조를 공격.
위화도 회군후 이성계 덕에 왕위에 올랐으나 이성계파의 개혁을 방해한 공양왕.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옹립했으니 공양왕까지 폐위시킬 명분이 부족함.
마침 공양왕이 대단한 불교신자였던거에요. 불교행사로 국고를 낭비함.
토지 개혁과정에서 등 돌린 이색
평소에 승려들과 교류가 잦아 이색이 불교에 아첨한다.

공양왕 옹립 이후 이성계파와 갈라섬


정도전의 혁명적 생각을 알아채고 등을 돌린 정몽주.
정몽주는 독실한 성리학자에요. 성리학의 이념과 모순점이 많았던 불교.
불교배철을 반대할수 없는 입장임.
하지만 불교를 공격하는 순간 혁명을 도모하는 샘이라.. 고려의 충신으로서 딜레마에 빠지는 정몽주.
불교배척으로 공양왕, 이색, 정몽주를 동시에 공격하게됨. 일거삼득의 정치공학.
이게 가능한 이유가 신흥사대부는 다 성리학자라 불교를 이단으로 생각해요.
이단은 배처의 대상이 됨. 고려에서는 유독 이게 잘 안돼요. 불교의 전통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뿌리 공자가 말한 인은


우리 배운대로 실천하자는 정도전.
불교개혁을 통해 드러난 정도전의 비전.
" 성리학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자!"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성계만 없으면 무너뜨릴수 있는 그런데 우연한 사고가 벌어집니다.

1392년 3월 17일 사냥하다 낙마해 부상을 당한 이성계. 이 틈을 타 선수를 친 공양왕.
정몽주가 왕명을 받아서 반대파들로 요직을 채우고 혁명파들의 탄핵을 주도함.
누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을까요?

1392년 4월 1일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정도전.
정도전을 인식공격까지 하는 정몽주. 친구였던 정도전과 칼을 겨누게된 정몽주.
토지 제도 개혁을 왕실에서 반대하자 이전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햇어요.
거기까진 좋아요. 개혁은 찬성하지만 왕에 대한 중성을 중시한 정몽주.
그 충심때문에 정도전과 엇갈림.
최후의 고려인은 정몽주가 돼야하지 않을까 싶다고..

고려를 지탱하는 더 중요한 존재.. 고려의 백성들..
고려를 멸망시킨 것은 고려의 사람들임.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건국.
백성들은 어제의 나라보다 세금이 적고 관리의 수탈이 줄고 이런나라는 없었죠.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한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
고려의 백성을 위해 고려를 멸망시킨 스스로 최후의 고려인이 되고자했던 정도전.

정몽주의 비극적인 최후가 정몽주가 이성계파를 공격할 때 심상치 않은 이성계파 배후의 움직임에 이때 악역을 맡은 사람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에요.

1392년 4월 4일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정몽주.
죽기 전 정몽주가 읊었다는 단심가




자객을 보기 싫어서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
이거 사실이 아니래요. 근거가 없음.
역사에는 근거가 없으면 거짓이에요.
이방원과 정몽주가 나눴다는 하여가와 단심가는 정몽주 죽음 직후의 기록이 아닌
1617년에 기록된 두편의 시에요. 선죽교 전설은 역사적 기록과 다름.
구전을 통해 각색된 이야기임.


조선시대에는 정몽주의 충성심을 높이려함.
혁명을 통해 건국된 조선은 정도전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오면 혁명만 무한반복이잖아요.
충신 정몽주 같은 사람이 필요햇죠.
조선이 안정기에 들어서자 정도전을 역적으로 기록. 비록 조선은 정도전이 건국했지만
조선왕조를 지켜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던 거죠.
정몽주가 제거되자 막강해진 이성계파. 새로운 나라를 만들 명분.
맹자의 혁명론은 민을 향한게 아닌 군주를 향한거에요.
민심을 잃으면 당신을 쫓아내겟다. 정도전은 맹자의 말을 민에게 한것.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해 조선을 건국함.

정도전은 왕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민심을 얻을 왕을 찾아 나섰던 거죠.
자신이 새 나라를 세웠다고 자부해 새 나라의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
조선의 수도와 궁궐의 이름, 최초의 법전을 지음.



정도전이 왕에게 지어올린 조선의 법전. 조선경국전.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은 바로 떠나버린다.
조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선언이죠. 그 선언의 첫마디가 민심이에요.
정도전이 꿈꿨던 민을 위한 정치.


위민.
이 시기에 어떤 나라의 어떤 정치가가 위민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위민을 위해 정도전이 추진한 정책은?
" 왕의 힘을 없애자!!"

재상 중심 체제를 만듭니다.
왕은 관념상으로만 권력을 갖고 재상이 통치의 실권을 갖는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왕은 존재한다. 왕은 존재할 뿐이다.
왕의 권한은 권력을 행사할 재상을 임명, 물러나 앉기.
재상의 권한은 인사권, 군사권, 재정관할권. 모든 정치는 재상이 한다.
왕위는 세습되는 것이기에 어린 왕 모자란왕 미치광이 왕까지 왕의 권력남용을 막을 장치로 재상을 만듬.

청렴하고 능력있는자. 철저한 능력주의 관리 선발제.
가장 능력있는 자가 재상이 되는 재상중심 정치론.
조선경국전을 왕에게 바친 정도전.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만들지 못했겠죠.
이성계는 정도전을 죽을때까지 지지했습니다.


안전장치를 만들어놔야죠.
왕에게 바른말 하는 관리인 언관.
직언이나 충언을 하는 신하.  강직한 언관들이 왕을 견제.
유능한 재상이 국가 권력을 행사. 이런 나라는 부패하지 않을 것.
재상도 언관의 감시를 받음.
세번째 안전장치는 혁명.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두번의 반정으로 폭군을 몰아낸 조선의 역사.
조선이 부패하지 않고 오래 지속할수 있었던 힘이죠. 그힘이 바로 정도전의 유산임.
우리 길에 남은 정도전의 또 다른 유산은 조선의 철학을 담아 지은 궁궐의 이름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들이 반발을 하죠. 이성계가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함.
이에 반발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을 살해하고
세자가 된 이복동생 방석까지 제거를 합니다.
만약 이방원이 왕이 된다면 정도전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권력을 포기할수 있을까요?
정도전을 제거했을뿐아니라 정도전을 지지하던 아버지 이성계를 쫓아낸 것.
새 나라에 대한 정도전의 꿈이 좌절..
위민으로 시작된 혁명의 길. 새나를 설계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은 정도전.
과연 그가 꿈꿨던 세상은 실현됐을까요?  정도전의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잖아요.

정도전은 아주 좋은 시스템을 만들었죠. 조선경국전 속 내용의 일부는 이후 경국대전으로 계승됨.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이 국가의 정책을 의논하는 체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권력감시 장치인 언관 기구를 강화.
하지만 이 시스템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수 잇었을까요?
임진왜란 이후 부패한 관리가 늘며 위민이라는 이상이 바래져 조선왕조 500년 동안
변화에 대응하며 개혁하는 노력이 부족함. 또다른 정도전이 필요했던 것.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할까요?
수업전에 받은 두 질문.. 좋은 사람이냐 나쁜사람이냐 영웅이냐 반역자냐
두질문의 공통점은 둘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건데
역사속 어떤 인물도 하나로 정의되지 않아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수백년 전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서로 방법이 달랐던 거죠.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
학생들에게 답을 안 줘떤 선생님은 현명한 대답을 한거라고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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